“선생님, ‘역세권’이 뭔가요?” 북에서 온 수강생이 물었다 - [경제문맹] 한국일보 202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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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화 벌리는 경제문맹]
북한이탈주민 경제금융교실 가 보니
KDI·KB공익재단이 2018년 시작
금융사기 피해 극심... 예방에 초점
“미국이 왜 금리 인상을 많이 했죠?” “인플레이션 때문이에요!”
“인플레이션이 뭐라고 배웠죠?” “물가 상승!”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 지난달 24일 오전 9시. 서울 양천구 양천사회단체봉사센터 한 강의실에선 주말을 잊은 강사와 학생들의 경제 수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수강생들은 30명 남짓 수용 가능한 컴퓨터 실습용 교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반짝이는 눈으로 강사 질문에 답했다. 수업 내용을 하나라도 놓칠 새라 필기하는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늦깎이 공부에 한창인 이들은 모두 북한이탈주민. 한국 사회에 뿌리내린 지 20년 차가 된 ‘선배’와 이제 막 정착한 ‘새내기’, 어린 딸을 무릎에 앉힌 젊은 엄마와 70·80대 할머니가 ‘경제금융교실 7기’ 동기생으로 인연을 맺었다. 한국개발연구원(KDI)과 미래한반도여성협회, KB금융공익재단이 협력해 2018년부터 진행 중인 이 교육과정은 총 12주, 50시간에 걸쳐 경제의 기본 개념을 다룬다. 남·북한 경제체제 차이점부터 신용관리나 저축, 투자, 보험, 소비자문제 해결법 등 실생활 금융교육까지 다양한 주제로 구성했다.
이날은 박남태 호서대 교수가 ‘부동산시장 전망과 주택청약종합저축’에 대해 강의했다. 박 교수는 “북한에 고난의 행군이 있었다면 한국엔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어려움이 있었다”와 같은 눈높이 설명을 곁들여 금리 인상기 휘청거린 국내 주택시장 상황을 설명했다. 이론 설명 후엔 “대출 이자보다 월세 부담이 크면 은행 대출로 보증금을 늘려 임차료를 줄이는 것도 방법” “북한이탈주민을 위한 장기전세주택 특별공급 정보는 남북하나재단 홈페이지 참고” 등 ‘원포인트 꿀팁’ 전수가 이어졌다.
문화와 언어의 벽을 실감케 하는 순간도 더러 있다. 두 시간에 걸친 강의가 끝났을 때 한 수강생이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그런데 ‘역세권’이라는 건 뭔가요?” 주변 다른 수강생은 “수도권 주변 지역”이라며 자신 있게 훈수를 뒀다. “자연스럽게 쓰는 말이지만 모를 수 있다. 지하철이나 기차역 주변 지역을 말한다”고 강사가 설명하자 그제야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KB·KDI 과정을 포함해 10년째 북한이탈주민 대상 교육을 하고 있는 박 교수는 “이제야 조금 소통이 되는 느낌”이라며 “그래도 강의 중 수강생들이 실제 흡수하는 내용은 많아야 20% 정도일 것”이라고 말했다.
대다수 북한이탈주민의 경제 지식은 ‘초등학생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수강생들은 입을 모았다. 그러다 보니 각종 사기나 명의 도용 등 범죄에 쉽게 휘말리고 한순간 신용불량자로 전락하는 사례가 수두룩하다는 것이다. 북한이탈주민의 62.3%가 금융사기 피해로 어려움을 겪었다는 북한개발연구소의 2021년 조사 결과도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한 2011년 한국에 들어온 60대 수강생 A씨는 “월급봉투 들여다볼 줄만 알았지 금리가 뭔지, 신용카드와 체크카드는 어떻게 다른지 하나도 몰랐다”며 “사기꾼에게 현금을 다발로 건넸다가 전부 날렸는데, 진작에 이런 교육을 받았다면 속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이런 현실을 고려해 KB·KDI 경제금융교실은 금융사기 피해 예방과 피해자 재교육에 특히 초점을 맞췄다. 수강생 선발 과정부터 남북하나재단과 신변보호경찰이 추천한 금융사기 피해자를 1순위로 포함하는데, 입소문을 타 이번 기수 모집엔 90명 이상이 몰렸다고 미래한반도여성협회 측은 설명했다. 교육과정 중 개인정보 보호와 금융사기 예방법은 서민금융진흥원이, 투자 피해 예방은 금융감독원, 채무자 구제제도는 신용회복위원회 실무자가 직접 강의를 맡는다.
자녀를 둔 수강생들은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경제·금융 문외한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다. 중학교 3학년 자녀를 둔 40대 북한이탈주민 B씨는 “학교에선 경제나 금융 교육을 거의 하지 않아 부모까지 모르면 안 되겠다는 위기감을 느꼈다”며 “열심히 배우고 가르쳐 최소한 아이들은 다른 친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강유빈 기자 yubin@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