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는 ‘고물가·고금리·고환율’이라는 난관을 허리띠를 졸라매는 ‘긴축’으로 헤쳐나가고 있다. 이것은 경제 정책의 기본이지만 감당해야 하는 국민의 삶은 날이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다. 지난 정부는 저금리와 재정 팽창으로 손쉬운 확장정책을 사용해 물가를 상승시키고 구조개혁을 지연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빚 1000조원을 물려받은 윤석열 정부는 고통이 따르더라도 긴축재정 기조를 이어가고 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만 “갈수록 살기 어렵다”는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미래가 희망적인 것도 아니다. 인구감소는 성장동력 자체를 갉아먹고 있어 향후 저성장이 불가피하다.
지난 6월 10일 서울 성균관대에서 만난 박재완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성균관대 명예교수)은 이명박 정부 시절 정무·국정기획수석비서관을 거쳐 고용노동부 장관과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냈다. 경제관료, 대학교수(성균관대), 국회의원(17대), 사외이사(삼성 이사회 의장)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했다. 박 이사장은 현재 우리가 맞닥뜨린 경제 현실과 관련해 “채무를 지닌 한계 자영업자도 급증하고, 원리금 상환 부담이 가중되고 연체가 늘어나고 있다” “물가상승은 ‘보이지 않는 세금’이다. 구매력이 감소하고 자원배분을 왜곡시킨다. 저소득층과 임금근로자에게 큰 타격이다” 등 어려운 상황을 지적했다. 그는 지금의 어려움에 대한 해결책으로 “‘연착륙’해야 한다. 폭탄 돌리기를 하면 안 된다. 앞으로 2년간 선거도 없는데 어려워도 정공법으로 나가야 한다”고 권고했다. 특히 “단속카메라와 과속방지턱만으로 ‘교통질서’를 잡는 것은 한계가 있다”며 “지킬 수 있는 법을 만들어서 예외 없이 집행하고, 거짓말과 위선을 배격하는 문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일본을 제치면서 인구 5000만명 이상 국가 중 6위를 차지했다. 이제 한국도 ‘선진국’이라 할 수 있을까. “국민소득·교육수준·기대수명 등 경제적인 측면에서 선진국이 된 지 오래되었다. 이미 20년 전에 국제통화기금(IMF),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국제기구에서 우리를 선진국으로 분류했다. 물가를 반영한 구매력(PPP) 기준으로 보면 우리는 이미 10년 전에 일본을 추월했다. 환율 덕을 본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국민들이 일본보다 더 큰 차를 타고 다닌다. 다만 문화·환경 등 ‘소프트파워’와 시민의식·투명성 등 사회자본으로 볼 때 아직 갈 길이 멀다. 나는 참된 의미의 선진국을 문명국이라고 부르는데 문명국이 되려면 아직 많이 노력해야 한다.”
- 국내총생산(GDP)이 11위에서 14위로 떨어졌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원화가 약세였고, 우리가 저성장 기조로 가고 있을 때 브라질, 멕시코 등 신흥국가들이 치고 올라왔다. 10~15위는 환율에 따라 조금씩 순위가 변하는 것이지 차이가 그렇게 크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향후 더 올라갈 수 있느냐인데 지금과 같은 저출생, 저성장 기조에서는 더 이상 올라가기가 상당히 어렵다. 더 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 선진국이 되면 성장률이 자연스럽게 낮아질 수밖에 없는 것인가. “일본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세계 2위까지 갔다가 낮아지고 있다. 중국, 인도 등 인구 대국이 치고 올라오기 때문이다. 이미 선진국으로 진입한 나라는 인구도 계속 늘기가 쉽지 않아서 고성장을 이어갈 수 없다.”
- ‘나라는 호황인데, 개인은 가난해진다’는 불만이 나온다. 원인과 대책은 무엇인가. “2023년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3만6194달러로 일본을 추월했다. 인구 5000만명 이상 나라 중 6위다. 산유국 등 인구가 적은 부국까지 포함하면 30위 안팎이다. 일본을 추월한 만큼 국민 개개인은 가난한 편이 아니다. 오히려 해외여행, 명품과 고가 자동차, 사교육, 미용성형 등 과시 소비 성향이 걱정된다. 다만 노인 빈곤율이 높고 사회복지 지출이 최근 보편적 복지 위주로 확대되어 사회안전망 사각지대가 상당하다. 선별복지에 역점을 둬 취약계층 위주로 지원해야 한다. 채무를 지닌 한계 자영업자도 급증하고 있는데 맞춤형 연착륙 방안이 절실하다. 원리금 상환부담이 가중되고 연체가 늘어나고 있다.”
- 선진국의 조건이 단지 ‘경제력’은 아닐 것이다. 한국이 선진국이 되는 데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선진 문명국가’가 되어야 한다. 소득이 높으면 더욱 좋을 것이다. 너무 편을 갈라서 싸우는 모습이 걱정이다. 나라가 ‘사분오열’ 되어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사회의 규율이 느슨해지면서 남녀, 노사, 세대 갈등이 커지고 있다. 여기에 교사와 학부모의 다툼까지 가세한 형국이다. 대중 영합 정치와 편 가르기도 심하다. 가짜뉴스와 프레임 씌우기도 만연하다. 공민의식, 직업윤리가 낮아지면서 얄팍한 상술로 ‘각자도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단속카메라와 과속방지턱만으로 교통질서를 바로잡으려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불신·배제·강제·감시·처벌·반목의 악순환을 존중·포용·자율·독려·자성·융합의 선순환으로 전환해야 한다. 지킬 수 있는 법을 만들어서 예외 없이 집행하고, 거짓말과 위선을 배격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 양보·헌신·기부·봉사가 필요하다.”
- 윤석열 정부는 고물가·고금리·고환율 상황이다. 지금처럼 어려울 때 특히 무엇에 주의해야 하나. “물가상승은 ‘보이지 않는 세금’이다. 구매력이 감소하고 자원배분을 왜곡시킨다. 저소득층과 임금근로자에게 큰 타격이다. 물가상승은 사실 거시적 요인의 영향이 크다. 최근 물가상승은 2020~2021년 코로나19 국면에 풀린 유동성이 주범이다. 지난 몇 년 편히 지냈던 청구서가 뒤늦게 도착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1인당 25만원 ‘민생 회복 지원금’은 효과가 크지 않으면서 물가를 부추기고 국고를 피폐하게 만드는 무책임한 날림 정책이다.”
- 문재인 정부 시절 국가 채무가 400조원 늘어 1000조원을 넘었다. 긴축재정은 불가피하나. “지난 정부는 저금리와 재정 팽창으로 손쉬운 확장정책을 사용해 물가를 상승시키고 구조개혁을 지연시켰다. 국가의 규율이 약해지고 재정 여력이 고갈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미래 세대의 부담이 커졌다. 재정건전성은 세대 간 약속이자 미래에 대한 투자다. 당장은 어려움이 있더라도 긴축재정 기조는 불가피한 선택이다. 작고 유능한 정부를 지향해 민간의 자율, 창의, 활력을 촉진하는 방향과도 부합한다. 우리는 OECD 국가 중 아직은 젊지만 30년 후 가장 늙은 나라가 될 전망이다. 성장률이 하락하고 사회보장비가 급증하고 있다. 연금 수지가 악화되고 의료비가 가중될 전망이다. 우리가 기축통화국도 아닌데 재정을 헤프게 쓰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 연금 개혁 방향은. “국민연금은 시한폭탄이다. 시간을 끌수록 고령층, 즉 국민연금 수혜자는 늘어나는데 보험료를 내는 근로자 비율은 줄어든다. 시간이 지날수록 개혁이 더 어려워지는 구조다. 일본의 경우 고령층이 많다 보니 부가가치세를 올리기가 어렵다. 차라리 소득세를 올리라고 한다. 더 내고 덜 받는 정도를 넘어 연금정책과 사회 정책을 분리해야 한다. 국민연금은 소득비례방식으로 개편하고, 기초연금은 대상자를 축소하고 노후 소득수준별 차등화를 검토해야 한다. 가입 기간 연장 및 자동안전장치 도입도 고려해야 한다. 완전 적립 방식의 ‘신연금’을 도입하되 개혁 이전 납입분에는 기존 확정급여형을 유지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국채 이자와 복지지출이 가파르게 상승 중인데 의무지출을 낮추기 위해 교육재정교부금과 복지지출의 구조조정도 시급하다.”
- ‘고물가’로 국민들이 힘들어한다. 국민들의 고통을 최대한 낮추면서 물가를 잡는 방안은 무엇일까. “고통이 따라도 긴축재정 기조는 유지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경제활동의 자유와 기회를 확대해야 한다. 자율·다양성·창의를 고취하고 혁신을 촉진해 생산성을 향상시켜야 한다. 세계 표준과 동떨어진 규제의 개혁과 전문서비스업을 선진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디지털 전환(DX)을 가속화하고, 일하는 방식을 혁신해야 한다. 소비 거품을 빼고, 농축수산업 수급과 가격 정보 시스템을 개선하는 구조개혁이 정공법이다. 과거 글로벌 금융위기로 돈이 많이 풀려 있을 때 ‘부가가치세 별도’라고 가격표에 애매하게 적혀 있었는데 소비자에게 혼란을 줬다. 이것을 모두 포함해 가격에 표시하도록 하게 하는 등 작은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힘썼다.”
-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이 결과적으로 전기 등 에너지 비용을 상승시켰다는 비판이 있다. 정권이 바뀌면 탈원전 정책이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는데, 향후 일관되게 유지되어야 할 에너지 정책 방향은. “자원이 없는데도 에너지 과소비와 화석연료 의존도가 높은 산업구조다. 탄소 생산성이 낮은데 탄소배출권 거래가는 저렴해서 탄소중립 부담이 상당하다. 무역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유럽연합(EU) 등이 구축하려는 탄소 장벽에 적응하도록 대비해야 한다. 원전은 탄소중립에 이르게 하는 긴요한 징검다리다. 원전 발전량을 늘리되 곧 포화상태에 이를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을 확충하고 고준위 방폐장을 건립해야 한다. 수소 등 신재생 에너지 기술 투자를 확대하고 일상생활에서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 ‘고금리’가 장기화되면서 대출이 많은 자영업자들이 힘들어한다. 이들을 위한 대책은 없을까. “‘연착륙’해야 한다. 폭탄 돌리기를 하면 안 된다. 앞으로 2년간 선거도 없는데 어려워도 정공법으로 나가야 한다. 고금리로 다중 채무 개인사업자가 급증하고 있다. 원리금 부담이 커지고 연체율이 상승하고 있다. 고금리로 가계 구매력이 약화되고 내수 부진이 이어지면서 자영업 매출도 위축되고 있다. 코로나19 기간 급증한 정책금융 지원으로 한계 자영업자의 고통이 커진 측면이 있다. 지금까지 대책은 ‘새출발’ 기금, 만기 연장, 상환유예, 대환대출, 신용 사면 등이었다. 이 중 일부는 성실 차주를 역차별하는 것이고 도덕적 해이를 부르는 ‘언 발에 오줌 누기 식’ 대처가 될 수 있다. 옥석을 가리지 않는 지원은 자기책임 원칙을 훼손하고 자영업 생태계를 악화시킬 수 있다. 상환 여력에 따른 맞춤형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업종 전환 지원 등 과밀 자영업 구조 재편과 금융권의 상환 능력 심사 과학화도 필요하다. 사실 가장 좋은 대책은 금리 수준보다 성장률을 올리는 것이다. 생산성 향상을 통한 일자리 창출과 소득 증대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 AI로 교육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대학 교육에서 가장 시급히 변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나는 항상 시험은 ‘오픈북’ 방식이었다. 퀴즈, 중간고사를 볼 때 책을 봐도 좋고 심지어 온라인 검색해서 답안을 써도 좋다고 했다. 우리가 일할 때 하나하나 찾아서 하지 다 외우고 있는 것이 아니지 않나. 핵심적인 기초 개념은 알아야 하지만, 이제는 창의적으로 질문하고 탐구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질문 기반 학습, 문제해결형 학습, 토론 참여가 중요하다. 학과별 칸막이를 낮추고 통합형 콘텐츠를 개발해야 한다. 지금의 학문체계는 이미 100여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평가’도 중요하다. 답을 한정해 놓으면 안 된다. 공정과 효율에 초점을 맞춘 객관식 평가에서 창의력을 중시하는 주관식 평가로 바꾸어야 한다. 학생보다 교수가 변화에 적응하고 혁신하는 것이 관건이다. 학생평가에서 AI의 도움으로 학생의 잠재력, 탐구력, 창의성을 평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의대 증원은 지방의대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타당했다고 생각하나? 오히려 교육 역량이 있고, 의료 수요가 많은 서울 의대 증원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의료 수급 및 고등교육의 서울 집중을 완화하고 ‘지역·필수 의료 거점’ 역할 강화를 통해 수도권과의 의료 격차를 해소하려는 취지로 이해한다. 이번에 증원을 허용한 정원 50명 이하의 14개 ‘미니 의대’가 모두 지방 소재다.”